북한의 청와대 습격작전에 참가했던 무장공비 출신 김신조 목사가 2025년 4월 9일 새벽, 향년 83세로 별세했습니다. 한때는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훈련받은 특수요원이었지만, 대한민국에 귀순한 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안보 강사로 살아왔던 그의 삶은 한 인간이 이념과 체제를 넘어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남게 되었습니다.
청와대 습격작전
북한의 유격전 전략과 1.21 사태의 전개
1968년 1월 21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무장공비 31명이 침투한 사건은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북한이 정찰총국 산하 124군부대를 통해 치밀하게 준비한 특수공작으로, 당시 김일성은 항일 유격전 전술을 현대화하여 대남 유격전을 본격화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예 유격부대는 1967년부터 연산과 상원 지역의 8개 기지에서 혹독한 특수훈련을 받았으며,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을 대상으로 한 청와대 습격 임무는 제6기지가 맡았습니다.
이들 31명은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의 장교들로, 1968년 1월 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에서 청와대를 본뜬 가상 건물에서 습격 시뮬레이션 훈련을 받았고, 이후 김정태 정찰국장으로부터 직접 작전 명령을 하달받았습니다. 침투 목표는 청와대뿐만 아니라 미 대사관, 육군본부, 교도소, 간첩수용소 등 서울 주요 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습격 후 곧바로 철수해 북한으로 복귀한다는 기습형 작전이었으며, 1월 18일 자정을 기해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서울 도심으로의 침투
세검정 자하문 초소에서의 격전
이들은 임진강을 얼음판으로 건너 파주 삼봉산과 앵무봉, 비봉을 거쳐 1월 20일 밤, 서울 도심의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검문을 받자 “우리는 방첩대원이다”라는 말로 속이려 했지만 의심을 받은 후 400여 미터를 더 진행하던 중,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이끄는 경찰 병력과 충돌했습니다.
공비들은 자동소총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최 서장은 총격으로 순직했으며 경찰관 두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이후 도심으로 흩어져 민간인 거주지를 공격하며 큰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서대문구 홍제동에서는 민가에 침입해 시민을 살해하고, 버스 승객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등 각종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들로 인해 이날 밤 최소 5명의 민간인이 희생됐습니다.
김신조의 생포와 이후 수색전
단 한 명의 생존자가 전한 진실
청와대 습격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군과 경찰은 합동 수색 작전을 벌였고, 1월 31일까지 28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하였습니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으며, 단 한 명만이 생포됐습니다. 바로 김신조였습니다.
그는 생포 직후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라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국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귀순을 결심했고, 정보기관의 철저한 심문과 보호 아래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게 됩니다. 김신조가 소속됐던 부대는 기관단총, TT권총, 수류탄, 단도 등 정예 게릴라전에 최적화된 무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들의 작전은 북한 유격전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됩니다.
목사로의 삶
신학 공부와 안보 강연 활동
귀순 이후 김신조는 서울침례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1997년 1월에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이후 성락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과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청소년과 군 장병, 시민을 대상으로 안보 강연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2018년 인터뷰에서 “남한에 처음 왔을 땐 매일 시위와 파업이 벌어지니 곧 망할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은 ‘꿈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나라라는 걸 알게 됐어요”라고 말하며 자유와 인간 존엄에 대한 자각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체제 전환 이후 진심으로 남한 사회에 녹아들며 살아온 그의 내면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죽음과 남긴 유산
공비에서 목회자로, 역사로 남은 전환의 삶
김신조 목사의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의 교원예움 서서울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그는 단순한 귀순자가 아니라, 체제를 넘어선 변화와 회개의 상징으로, 전후 한국사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의 생애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남깁니다.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변화할 수 있으며, 그 변화는 어떻게 사회 안에서 용납되고 자리 잡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또한 그는 국가 안보의 중요성과 자유의 소중함을 살아 있는 목소리로 전한 마지막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념의 적에서 이웃과 목회자로 변화한 그의 삶은 여전히 남북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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